기사검색

항일투사 김원봉 vs 공산주의자 김원봉...어느쪽인가?

가 -가 +

임두만
기사입력 2019/06/07 [13:35]


[신문고뉴스] 임두만 편집위원장 = 한 인물을 두고 정치권과 언론이 뜨겁다.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조직 조선의열단을 만들어 일제와 맞선 약산 김원봉
(18981958)이 주인공이다. 

일제는 그의 생존 당시 포상금
100만 원(현 환율 환산 320억 원)을 내걸고 체포에 열을 올렸다. 당시 일본이 김구 임시정부 주석에게 60만 원의 포상금을 걸었으므로 김원봉의 포상금이 얼마나 많은지, 일제가 그를 얼마나 체포하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현재 MBC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이몽'의 주인공인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열단 단장, 조선의용대 대장, 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장으로 활약했다.

▲ MBC 드라마 '이몽'의 스틸컷... 배우 유지태가 김원봉으로 분해 열연 중이다.  © 임두만


그러나 김원봉은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된 뒤 1948년 월북했다. 이후 그는 북한 정권수립 핵심인물로 참여,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초대 내각 국가검열상을 맡았다, 당시 북한은 국내는 물론 중국 소련 등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소련파, 연안파, 국내파, 남로당파, 김일성의 빨치산파 등 다양한 파벌로 형성된 집단지도체제로서, 무장 항일독립운동 수장이었던 그가 내각에 참여한 것이다.

 

6·25 전쟁 당시에도 그는 북한의 노동상 겸임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였다. 그리고 휴전 후에는 노동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김일성이
1958년 소련파 연안파 남로당파 등 정적들을 차례로 제거하는 과정에서 숙청됐으며, 이 세력들의 숙청 성공으로 북한은 김일성 유일지배체제가 굳어진다.

 

그리고 김원봉은 혁혁한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공로까지 남과 북 어디에서도 추앙받지 못했다. 남측은 월북한 공산주의자 정도로, 북측은 숙청당한 반당분자로 그를 남겨둔 것이다.

 

이런 그가 사후 61년 만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야는 물론 시민사회까지 난타전을 벌이는 대상이 되어 있다. 특히 그 정쟁의 모티브를 문재인 대통령에 제공,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문 대통령은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마지막 5년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같은 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자유한국당 등은 반발을 넘어 들끓고 있다. 문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로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열단까지 언급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자세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문 대통령이)현충일에 김원봉을 치켜세우는 발언을 한 건 일부러 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보수우파가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으로 야당의 비난을 유도해 분열을 만들고 갈등을 부추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도  "문 대통령이 진정 국민통합 의지가 있는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문 대통령은 사회통합을 말하려다 오히려 이념 갈등을 부추기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추념사의 기본적 핵심적인 메시지는 애국 앞에서 보수·진보가 없고, 정파와 이념을 뛰어넘어 통합으로 가자는 취지"라며 "통합을 통해 임시정부가 구성된 점, 임정이 이념·정파를 뛰어넘어 통합을 주창하고 노력한 점 등을 강조하는 취지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 물러설 뜻이 없음을 말했.

 

그런데 김원봉의 행적을 살피면 남북화해의 과정에서 그를 통한 통합의 필요성을 청와대가 언급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김원봉을 해방 후 좌우대립의 희생양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해방 후 귀국한 뒤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함께 좌우합작을 추진했으나 공산주의자로 몰려 친일경찰의 상징이었던 노덕술에게 검거돼 모욕을 당하기도 하는 등 곤욕을 치렀다.

 

이후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던 악질 친일경찰의 상징 노덕술이 이승만 대통령의 옹호 하에 '반공투사'로 변신, 활동하자 이승만과 함께할 수 없음을 결심한 것 같다. 이에 그는 1948년 김구 김규식 등과 평양 남북협상에 참여한 후 북한에 남는 것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보면 김원봉은 해방정국에서 친일을 용인하지 않은 북측을 선택한 것이 된다. 물론 그가 조선의열단 단장으로 활동할 당시 코민테른 지금을 지원 받아 활동했다는 설도 있으므로 공산주의자로서의 항일무장투쟁운동가였다는 한편의 주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혁혁한 항일투쟁의 전과를 무시하면 더더욱 안 된다. 따라서 청와대의 " 애국 앞에서 보수·진보가 없고, 정파와 이념을 뛰어넘어 통합으로 가자는 취지"라는 말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이에 진보 시민사회는 자유한국당 등의 반발을 비판하면서 김원봉의 월북이 노덕술 등 악질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 때문이었음을 주장, 친일파 척결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즉 악질 친일경찰에 쫓겨 월북했으나 김일성에게 숙청을 당한 비운의 혁명가라며 이 기회에 다시 친일파의 척결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Share on Google+ band URL복사
URL 복사
x
  • 위에의 URL을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PC버전 맨위로

Copyright ⓒ 신문고. All rights reserved.